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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으로 56억을 벌고 56억으로 140억으로 불린 강방천

조~~ 아 2005. 12. 26.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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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으로 56억을 벌고 56억으로 140억으로 불린 강방천


월간조선 1999년 10월호

<수기>
1년 10개월 만에 1억으로 1백56억원을 번 주식도사 강방천의 가치 투자 비결

『늘 생각했다. 가치 있는 곳이 어디인가를. 가치를 찾는 기준은 상식을 따랐다. 그리고 잠을 충분히 잤다. 맑은 정신으로 생각하려고…』;

▲ 강방천

ㅇ 1960년 전남 신안군 암태면 출생. 1987년 외국어대 경영정보학과 졸업. 1987년~89년 SK증권 근무. 1989~94년 쌍용투자증권 펀드매니저로 근무. 1994년~95년 동부증권 펀드 매니저, 1995년~98년 이강 파이낸셜 서비스(주) 전무, 이강금융 컨설팅(주) 전무 역임. 1998년 7월부터 에셋플러스 투자자문(주) 전무이사.



믿기 어려운 수익률을 기록하여 에셋플러스 투자자문(주)을 창업한 姜芳千 전무(39)는 그 비결을 가치투자라고 말한다. 펀드 매니저 6년 경력의 姜씨는 주식을 살 때 자신이 세운 기준에 맞추어 수없이 생각한 뒤 內在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종목을 수개월간 꼼꼼히 지켜보다가 최적기에 매입한다. 「內在가치가 좋은 종목에 대해 적절한 매수시점을 잡아 장기 보유하는 것」이 그의 증권투자 전략이다. 그는 직장인의 증권투기는 부도덕한 행위라고 단정했다

가치를 찾아라


1억으로 53억, 1억으로 1백40억을 벌었다는 기사가 나면서부터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그동안 얼마나 더 벌었는지 그것부터 궁금해한다. 또다시 내게 재산이 얼마나 불어났느냐고 묻는다면 1백56억원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일부 주식을 처분해 지난 7월14일에 문을 연 에셋플러스 투자자문주식회사에 16억을 투자하고 1백40억 정도의 주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재산이 그렇게 많으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묻는 사람도 많다. 정작 나는 돈이 얼마나 더 불어났는지 크게 관심이 없으며 엄청난 돈 때문에 기분이 들떠 있는 것도 아니다. 특히 나는 가치투자를 통해 장기간 보유하기 때문에 돈이 쌓이는 일에 민감한 편이 아니다. 時勢(시세)차익을 노리고 주식을 사고 파는 사람과는 아무래도 느끼는 감정이 다를 것이다.

다만 지난 7월14일 내가 오랫동안 염원해왔던 투자자문주식회사를 차린 것 때문에 요즘 기분이 한껏 鼓舞(고무)되어 있고, 회사에 들어설 때면 주식 투자로 돈을 벌었다는 것이 새삼 실감나곤 한다.

현재 나의 직함은 전무이사이다. 에셋플러스 투자자문회사 주식의 53%를 갖고 있지만 나 자신이 리더십이나 조직 관리보다는 자산운용과 유가증권 분석업무에 더 어울린다는 판단 아래 전무이사를 자청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많은 수익을 낼 수 있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이다. 내가 1억원을 투자한 시기가 1997년 12월이었으니 1년 10개월 만에 1백56배의 수익을 올린 셈이다. 비결은 단 하나, 가치투자에 있다. 끊임없이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가장 가치 있는 곳에 투자한 것이 많은 수익을 낸 비결이다. 내가 그렇게 말해도 사람들은 무슨 책을 참고하느냐, 어떤 신문을 보느냐고 구체적으로 파고드는 경우가 많은데 책이나 신문, 방송보도를 참고는 할지언정 결코 내 판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가치를 찾는 기준은 상식이다. 세상 일은 상식선에서 생각하면 저절로 해답이 보이기 마련이다. 그래도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를 대비해서 내가 마련한 대답은 충분히 잠을 자라는 것이다. 가치 투자를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려면 정신이 맑아야 하고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면 피곤이 완전히 풀릴 때까지 잠을 자는 게 중요하다.

가치투자, 가치를 찾는 법, 가치를 찾기 위해 상식을 끌어들이는 과정, 이런 것은 설명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내가 주식을 사기까지 어떤 생각을 하는가를 加減(가감) 없이 얘기하는 것이 가치투자 방법을 쉽게 알리는 길이 될 것 같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증권회사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가끔 그때 증권회사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곤 한다. 1987년 6월, 나는 한국외국어대학교 경영정보학과를 조기 졸업했다. 성적이 4.5만점에 4.43으로 전체수석이었다. 학교의 추천으로 코리아제록스에 시험을 봤는데 3차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다시 추천받은 회사가 증권회사였다. 1987년 6월 동방증권(현 SK증권)에 취직이 되어 전산실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전산실 업무가 적성에 맞지 않아 2년 만에 그만두었다.


주식회사는 미래의 생명체


1989년에 다시 취직한 곳이 쌍용증권(현 굿모닝 증권)이다. 경력사원으로 입사하여 서울 신설동 지점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불공정 거래같은 편법에는 눈돌리지 않고 전망 있는 기업을 찾아 철저히 가치 투자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처음에는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신규 상장종목만 연구했다. 신규 상장종목은 장이 떨어지면 다른 종목보다 더 떨어지는 위험부담이 있는 반면, 제대로만 하면 엄청난 이익을 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대학 때 남들은 재미없다는 회계학에 유독 관심이 많아 회계학 공부를 많이 했는데, 그것이 기업 재무제표 분석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당시 나는 회계학을 다시 꼼꼼히 공부하면서 주식들을 하나하나 살펴나가기 시작했다.

나의 기업분석 방법은 첫째 기존 회사에서 제공하는 재무제표를 샅샅이 해석하는 것이다. 둘째 재무제표는 불투명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익을 조작하는 粉飾(분식) 가능성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재무제표를 수정해서 보면서 再(재)해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셋째 기존 재무제표가 제공하지 못하는 경영자의 자질, 조직의 인재 구성, 브랜드 이미지, 기술력 등을 따져봐야 한다. 이러한 분석능력은 철저히 본인의 능력에 달려 있는데 조금만 부지런하면 그런 것도 알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매장을 찾아가 보고 납품업자들을 만나서 얘기해보면 그 회사가 얼마나 좋은지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넷째 진입의 장벽이 있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예전에는 한국이동통신(現 SK텔레콤)의 경우 독점사업이었다. 코카콜라 같은 회사는 독특한 음료맛을 따라 가기가 힘들다. 다른 회사가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진입하는 데 장벽이 있으므로 이런 회사는 당연히 가치가 높다. 이런 것이 바로 계량화할 수 없는 기업가치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따져보는 것이 기업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巨視的(거시적)으로, 또 微視的(미시적)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가 따져봐야 하는데 거시적인 요인으로 환율, 금리, 인건비가 있고 미시적인 요인으로는 회사, 제품가격, 원재료 가격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현재 예상되는 기대수익률이 얼마나 될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

주식회사는 미래의 생명체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미래예측이 필요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주식은 인간들의 삶에서 해답을 얻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삶을 예측하면 주식투자의 해답이 나오기 마련이다.


주식은 타이밍의 예술


어떤 기업이 좋아질까. 당연히 효용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가 좋아진다. 1989년도에 나는 쌍용투자증권 신설동 지점 경력사원이었는데 당시 휴대폰은 큰 회사의 사장쯤 되어야 가질 수 있는 물건이었다. 비싸서 살 수 없을 뿐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물건이었다. 효용이 있다는 얘기이다.

한국이동통신(現 SK 텔레콤)의 기업내용을 분석해본 결과 투자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섰다. 상장되자마자 6만주를 매입했는데 당시 주가는 2만1천원이었다. 당시 한국이동통신의 매출실적은 그리 높지 않아서인지 다른 직원들에게 추천했을 때 다들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한국이동통신의 주식을 파는 시기는 내가 휴대폰을 살 때쯤으로 잡았다. 나 정도되는 사람이 살 정도면 누구나 다 쓴다는 생각에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 1995년도에 한국이동통신 주가는 76만원으로 올랐다. 그때를 매도시기로 잡았다.

그 후에도 한국이동통신의 주가는 계속 올라 최근 1백76만원을 기록했지만 適時(적시)에 팔았다고 생각한다. 1만원짜리 주식이 3만원으로 오르기는 쉬워도 75만원짜리가 3배 오르기는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1993년 7월 태영주를 사들일 때만 해도 태영의 기업 내용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子會社(자회사)인 서울방송이 적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주식시장에서는 子회사 개념이 없었다. 어떤 기업의 자회사까지 일일이 분석해서 투자하기란 벅찬 일이다. 하지만 투자의 요소를 철저히 따지는 것은 투자자의 몫이다. 子회사도 결국 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신문에서 정부 주도하에 子회사의 경영실적까지 투명하게 공개하는 연결회계 제도를 도입할 것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그것이 주식시장에 영향을 끼칠 것으로 생각되었다. 子회사까지 투명한 기업분석을 공개하는 연결회계 제도가 도입되면 태영이 주목받을 것으로 내다봤다.

1993년에 태영의 子회사인 서울방송을 철저히 분석한 결과 조만간 흑자전환이 가능할 거라는 판단이 섰다. 바로 이듬해 서울방송은 흑자로 돌아섰고 母회사인 태영 주가는 2만원에서 7만6천원으로 올랐다. 27만주를 매입해 총 2백억원의 수익을 얻은 것이다.

나는 쌍용증권에 다닐 때 4년 동안 수익률이 업계 최고라는 명목으로 쌍용그룹 회장상을 받아 온 가족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주식은 타이밍의 예술이다. 사고 파는 시기를 잘 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시기를 선택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동부증권으로 자리를 옮긴 후 삼성전자와 포철 현대자동차 등 주로 우량주를 공략했다. 7만원에 매입한 삼성전자 주가는 14만원까지 올라갔다. 어떻게 주가가 오를 것을 아는가? 대답은 역시 똑같다. 모든 해답은 주변에서 나온다. 신문기사를 볼 때 단순하게 기사 그 자체로만 봐서는 안 된다. 기사 내용을 소화하고 그 내용이 어떤 현상을 야기할 것인가를 추론해야 한다. 또 광고 하나를 보더라도 「혹시 주식시장과 기업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하는 것을 따져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정보를 찾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정보를 再(재)해석하는 능력을 갖는 것이 더욱더 중요하다. 재해석 능력을 기르려면 상식에 비추어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

광고를 보고 수익을 낸 예를 들어보자. 1995년 1월 동부증권 펀드매니저 시절 공익광고협의회에서 제공하는 공익광고를 보고 나는 무릎을 쳤다. 당시 경찰청과 도로교통안전협회에서 「음주운전을 예방하자」는 공익광고를 했는데, 그 광고를 통해 음주운전이 줄 것이고 음주운전이 줄어들면 보험회사의 지출이 줄어 수익이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고가 나간 뒤 신문에는 자동차 보험에 가입하는 차가 늘고 있으며, 손해보험사의 손해율도 하락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다각도로 조사를 해보니 기사 내용이 사실이었다.

1995년 1월부터 4월까지 제일화재 19만주를 2만원에 사서 8월에 3만6천원에 팔았다. 쌍용화재는 13만주를 1만2천원에 사서 2만8천원, 신동아화재 7만주를 1만8천에 사서 3만1천에 팔았다. 1995년에 3개 회사의 주식을 사서 평균 두 배 이상의 수익을 낸 것이다.

세 군데 보험주를 팔아 삼성화재주 4만주를 21만원에 매입했다. 1995년 12월에 매도할 때 삼성화재주는 43만원이었다.

또한 보험주로 벌어들인 수익으로 1995년 8월, 47만원인 한국이동통신주 3만주를 샀다. 1995년 10월부터 이동통신이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에서 디지털방식인 CDMA(코드분할다중방식)로 변환된다는 보도가 나왔던 것이다. 디지털은 기존의 아날로그보다 10~20배의 가입자를 수용할 수 있어 당연히 株價가 올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생활 주변을 살펴라


보험주로 벌어들인 수익을 갖고 매입한 또 하나의 종목이 바로 삼천리 주식이다. 삼천리 주식은 생활 주변에서 가치를 찾아서 수익을 낸 경우이다. 그 즈음 나는 도시가스가 설치되지 않은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도시가스를 설치하려면 가입자가 설치비를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몇십 만원 정도 되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돈이 어디로 가는가 조사해봤더니 도시가스 회사로 고스란히 귀속되었다. 재무제표를 살펴봐도 수익으로 잡혀 있지 않았고 손익계산서에도 이 돈이 나와 있지 않았다. 대신 대차대조표의 자본잉여금으로 직접 計上(계상)되어 손익에 반영되지 않으면서 기업가치가 증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주주의 이익이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삼천리는 도시가스와 함께 연탄도 취급했는데 연탄 사업자는 국가에서 국고보조금을 주게 되어 있다. 그 돈도 주주의 몫으로 귀속되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3만6천원에 17만주를 샀다. 두 종류의 주식을 사놓고 동부증권을 그만두었는데 한국이동통신은 잘 알다시피 1백75만원까지 올라갔고 삼천리는 8만원까지 올랐다. 회사에서 어느 시점에 매도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이득을 보았을 것이다.

보험주와 한국이동통신주, 삼천리주의 경우 아주 간단한 생각에서 출발해 큰 수익을 남긴 경우이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지나치지 말고 가치를 찾고 再(재)해석하는 버릇을 들이는 것, 그게 바로 주식투자의 성공 비결이다.

나는 증권회사에 다닐 때 회사의 자산운용을 담당했는데 일반 투자자들에게 투자 자문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늘 아쉬웠다. 그래서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하겠다는 꿈을 안고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함께 일하던 동료 셋과 뜻을 같이 했으나 투자자문회사를 차리려면 10억원의 돈이 있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꿈을 접어야 했다.

우리 넷은 투자자문회사 대신 이강파이낸셜서비스라는 컨설팅 회사를 차렸다. 기업컨설팅과 금융컨설팅을 담당하는 회사였다.

증권회사를 그만두고 내가 주식에 투자한 것은 딱 한 번이다. 1995년 11월 대성자원 주 2천주를 2만3백원에 샀는데 1996년 5월에 12만7천원까지 올랐을 때 팔았다. 대성자원 주식은 이후 19만원까지 올랐는데, 나는 원래 8만원대에 팔려고 작정했기 때문에 큰 아쉬움은 없었다. 그때 얻은 수익으로 아파트 잔금을 치를 수 있었다. 그후로는 기업컨설팅을 하면서 외부에서 맡기는 돈을 투자하느라 시간이 없어 내 개인 투자는 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가진 돈이 없었다.

왜 이름도 생소한 대성자원을 선택했는가? 대성자원은 時價(시가) 총액이 54억원에 불과하지만 대단한 우량회사였다. 대성자원은 현금을 80억원 보유하고 있었고 대구도시가스와 대성산소라는 우량기업을 子회사로 거느리고 있었다. 게다가 석회석광산을 갖고 있었고 탄광지역에 5백만 평의 땅을 갖고 있었다. 또 영업이익이 개선되고 있는 추세였다.


수급 불균형과 과도한 투자


나는 대성자원의 이러한 우량성을 보고 투자했는데 엉뚱한 이유에서 주가가 상승했다. 탄광지역 카지노 사업자 선정 문제가 나오자 그쪽에 땅을 많이 갖고 있는 대성자원의 주가가 급등한 것이다. 조금 빨리 주가가 오르긴 했지만 그러한 건수가 없었어도 대성자원은 주가가 충분히 오를 수 있는 회사였다. 대성자원은 그후 대성산업에 흡수 합병되었다.

내게 실패한 경험은 없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펀드매니저 시절부터 나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투자자문을 구하곤 했는데 내가 증권회사를 그만두고 대성 자원주식을 매입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했다. 당시 주변 사람들이 매입한 주식이 20만주에 이르는데 8만원에서 판 사람도 있지만 18만원까지 기다렸다가 매도한 사람들도 있어 모두들 큰 이득을 봤다.

나는 그들에게 대성자원 주식을 매도한 금액으로 삼성전자 주식을 사라고 권했다. 장기적으로 삼성전자 주를 보유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995년 9월에 17만6천원까지 올라갔던 삼성전자 주가가 서서히 하락하고 있었다. 다시 오를 것으로 예상하고 14만원에 샀다가 2만원 손해보고 12만원에 팔기도 했고, 11만원에 샀다가 7만원에 팔아 손해본 적도 있다. 2만원짜리 대성자원 주식이 올라 삼성전자 주식을 산 것이므로 결과적으로는 손해가 아니지만 어쨌든 삼성전자 주식으로 인해 손해를 본 셈이다.

1996년도 들어서면서부터 우리나라의 경기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정보통신 관련 주식의 전망을 밝게 보고 삼성전자 주식을 샀던 것인데 반도체가 호경기에서 불황기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던 것이다. 1996년 6월 7만6천원에서 삼성전자 주식을 모두 매도했다.

왜 반도체가 인기인지 묻는 사람들도 많다. 이제 앞으로는 디지털의 시대이다. 0과 1의 조합을 통해 모든 게 계산되고 처리되고 디스플레이되는 디지털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가 명령을 내리면 실질적인 계산은 반도체가 계산하고 기억한다. 정보화와 통신혁명은 디지털과 맞물려 있으며 결국 반도체가 혁명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1996년도에 반도체 가격이 폭락한 것은 需給(수급) 불균형에서 비롯된 문제일 뿐 앞으로도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또 한 번의 실패는 1997년 3월에 매입한 한진주에서 발생했다. 2년 전부터 宅配산업을 눈여겨보다가 전망이 좋다는 판단이 서서 1997년 3월에서 5월까지 1만4천원하는 한진주를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7월에 2만 3천원까지 올라갔으나 나는 더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팔지 말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하면서 결국 1997년 11월에 3천8백원까지 떨어졌다. 결국 1997년 12월, 9천원대에서 팔도록 권유했다. 한진은 당시 택배사업 과도한 투자를 한 상태인데 갑자기 외환위기가 오면서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한국엔 백만장자가 너무 많다


대성자원주를 팔아 집을 마련하긴 했지만 나는 원래 집을 사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1996년에 주택을 구입한 것은 아내가 집은 꼭 있어야 한다고 우기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산 것이다. 내가 집을 사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 나라 집 값이 너무 비싸다는 것과 전세로 사나 집을 갖고 있으나 효용가치는 똑같은데 비싼 돈을 주고 집을 사는 것은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2억짜리 집을 月貰(월세)로 환산하면 월 4백만원짜리 집이라는 결론이다. 하루에 13만3천원을 깔고 자는 셈이다. 당시 특급호텔의 하룻밤 숙박료가 9만원인데 많은 사람들이 매일 특급호텔보다 더 비싼 가격을 지불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가격은 효용에 비례해야 하는데 똑같은 효용을 누리면서 전세보다 자기 집에 사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가격을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혹시 집값이 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투기심리와 함께 내 집은 있어야 한다는 舊(구)시대적 발상이 집값의 거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나는 당시 아파트 가격과 전세가격은 동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동산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크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직도 집값에 거품이 들어 있으나 장기적으로 볼 때 반드시 거품이 걷힐 것으로 보인다.

나는 석사도 아니고 더구나 외국유학을 한 적도 없다. 대단한 실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며, 생각을 많이 하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1992년부터 나는 우리 나라에 백만장자가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환율이 8백50원 정도였는데 주변에 8억5천만원을 가진 부자가 너무 많았다. 3억짜리 아파트 한 채, 예금 5천만원~1억, 월소득 2백만원(이자율로 따져 수익가치 2억)이면 백만장자 대열에 끼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백만장자라면 엄청난 부자이다. 미국 국민소득의 4분의 1도 안되면서 백만장자가 미국보다 더 많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일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재산을 달러로 환산하면 과연 어떻게 될까. 특히 부동산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예금과 수입도 환율 변동에 따라 큰 차이가 날 수 있다. 결국 「부동산 비중이 너무 크고 달러 환율이 너무 낮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백만장자가 너무 많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의 富(부)는 부동산이 주를 이루지만 미국의 경우 소득이 주를 이룬다. 한 마디로 거품이 너무 많다는 얘기다. 당시 나는 언젠가 한번쯤 교정작업이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백만장자가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3천4백만원을 달러로 예금


이제 부동산에 대한 과도한 소유욕은 정보통신 혁명 앞에서 수그러들 것으로 보인다. 백화점이나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는 생활방식이 바뀌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많은 물건을 구입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교통이 편리하거나 백화점 가까이에 있는 집에서 살 필요가 없어진다. 인터넷 교육이 활성화되면 이미 무너지고 있는 8학군은 유명무실해질 것이다. 사람들은 공기 좋고 한적한 교외에 살면서 삶의 질을 추구할 것이다. 도시 위주의 집값이 全 국토적으로 평준화되어야 될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러한 판단에서 집을 사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외환위기가 올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집 값이 너무 비싸고 상대적으로 달러가 너무 싸다는 생각에서 집값이 떨어지고 달러가 강해지면서 환율이 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97년 4월, 내가 가지고 있던 예금 가운데 3천4백만원을 달러로 예금했다. 당시 환율은 8백45원 정도였다. 원화를 달러로 예금하면 찾을 때 달러로 내주지는 않지만 달러로 환산해서 원화를 내준다.

나는 항상 가격 변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가격 변수가 불균형을 조정해주고 자원을 재분배해주기 때문이다. 임금이 높아지면 설비를 들여와서 고용을 줄이고, 임금이 낮아지면 직원채용을 늘리게 된다. 가격은 시장의 불균형을 배분해주는 중요한 변수이다.

달러는 중요한 가격변수이다. 달러의 변화로 말미암아 원화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외환위기를 통해서 똑똑히 목격했다. 외환위기가 닥쳐오면서 달러가 오르고 원화 가치는 하락하기 시작했다. 1997년 12월 초 1달러에 8백원대이던 원화가 1천3백40원으로 올랐다. 갖고 있던 예금을 찾으니 6천만원 가량이 되었다. 거기다가 내가 보유하고 있던 원화 예금 4천만원을 합쳐 내 수중에 1억원이 생겼다.


주가 떨어질 때 과감히 매도


나는 예금을 찾으면서 주식투자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주가가 마구 떨어지는 시점이었지만 환율이 오르니 수출관련주가 좋을 것이고 금리가 높아지면 현금을 많이 보유한 기업의 주가가 오를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1997년 12월 중순 내가 선택한 회사는 영원무역과 대덕산업이었다. 당시 영원무역주는 1만4천원, 대덕산업 주는 4만2천원이었다. 내가 갖고 있던 1억원과 신용거래 6천만 원을 합쳐 두 회사 주식 1억6천만원 어치를 샀다.

두 회사의 주식을 산 이유를 살펴보자. 영원무역은 스포츠웨어 專門업체로 전세계에 수출을 하고 있었는데 재무구조와 이익구조가 튼튼했다. 또 경영자의 성향이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쓸데없는 데 투자를 하지 않는 회사였다. 대덕산업은 인쇄회로기판 생산업체로 초우량 기업이었는데 현금을 4백60억원이나 보유하고 있었다. 경영자는 그야말로 匠人(장인)정신을 갖고 오로지 한 길만 파서 그 분야의 일인자가 된 사람이었다. IMF 초기 주식가격이 마구 떨어지기 시작할 때 나는 과감하게 두 회사의 주식을 샀다.

1998년 2월 초 영원무역을 3만3천2백원에, 대덕산업은 7만2천원에 팔았다. 당시 대부분의 주식 가격이 하락했지만 두 회사의 주가는 상승했다. 나의 판단이 옳았던 것이다. 증권사에 6천만원을 갚고 2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내 수중에 3억원의 돈이 생긴 것이다.

1998년 2월 초, 우리나라는 IMF가 제시한 여러 가지 처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 처방을 보면서 나는 우리 경제가 위기를 통해 무엇인가를 얻을 것인가를 생각했다. 苦盡甘來(고진감래), IMF가 제시한 처방들은 한국 경제에 커다란 이득을 남길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펀드매니저 시절 나는 우리나라 소액주주들이 부담하는 위험이 너무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같은 주주인데 5~30%를 갖고 있는 대주주의 불합리한 투자 때문에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수많은 소액주주들이 피해를 봤던 것이다. IMF가 이러한 위험을 제거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호 지급보증을 없애는 것은 매우 잘된 일이었다. 만도기계는 우량기업이지만 대주주가 한라그룹에 지급보증을 서는 바람에 엉뚱하게 소액주주들이 피해를 봤다. 상호지급보증만 없었다면 당연히 만도기계 소액주주들은 큰 이익을 얻었을 것이다. 삼성전자 소액주주들은 대주주의 개인적 취미 때문에 큰 피해를 봤다. 이건희 회장의 고집으로 삼성자동차를 설립하는 바람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된 것이다.

IMF 이전의 주식시장에는 투자문화가 아니라 투기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IMF 이전에는 대주주인 회장은 이사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법적 소송에 대한 책임이 없었다. 대신 권한은 무한대였다. 그야말로 잘못된 지배구조였다. IMF 이후 대주주도 반드시 이사 직함을 달아야 한다는 법이 생겼다. 그렇게 되면 대주주가 배당이익에 대해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행장들의 대출비리가 드러나자 재산을 압류당하고 처벌을 받는 것도 달라진 관행이었다. 기업들이 거액의 돈을 빌려 무분별하게 투자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또 社外(사외)이사 제도 도입을 보면서 대주주들이 마음대로 전횡을 휘두를 수 없어, 소액주주들이 위험에서 해방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불투명하고 부도덕한 지배구조가 서서히 개선되고 있었다. 1998년 1월과 2월 나는 우리나라에 新(신)주권문화가 정착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느끼면서 본격적으로 주식투자를 결심했다.


新주권문화와 시스템의 변화


또 하나 주식투자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부추긴 것은 바로 기업이익이 증가할 것이라는 확신이다. 아무리 新주권문화가 왔다고 해도 내가 투자하는 기업의 이익이 증가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IMF 관리체제 하에서 기업 이익이 증가할 거라고 판단한 이유는 우리나라 기업이익은 단기적으로 원 달러 환율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 때문이다. 환율이 오르면 환차손 때문에 실적이 악화된다. 반대로 환율이 내리면 환차익 때문에 영업이 안되어도 명목 기업이익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1997년에 환율이 올라 기업 이익이 줄어들었지만 1998년에 상장기업은 換差益 때문에 이익이 증가할 것으로 예측됐다.

당시 환율이 1천6백원 선이었는데 환율이 떨어지면 분명히 환차익이 나서 기업이익은 증가할 거라는 판단이 섰다. 또 하나 금리가 엄청나게 높았지만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다. 금리가 높으면 증권시장 돈이 은행으로 이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기업에 이익이 나서 자금 수요가 없으면 당연히 금리가 떨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1998년 초 금리가 25%였는데 결코 길게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금리하락은 2000년 기업이익에 플러스로 작용할 것이라는 것이 당시 나의 판단이었다.


證市 최악 때 투자시작


우리나라는 1998년 2월 주주보호 시스템이 확립되었으며 2000년까지 기업이익이 증가할 것이다. 따라서 내년 상반기까지 우리나라 주식시장의 전망은 매우 밝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일본은 이미 4~5년 전부터 금리가 1%에 불과해도 주가가 오르지 않았다. 그것은 종신고용에다 정경유착 등 변화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올해 들어서 일본도 서서히 변화하고 있는데 시스템은 우리 나라가 더 빠른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 미국은 왜 주가가 오르지 못하는가. 미국 경제는 함부로 예측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다만 미국은 7년간 장기 호황을 누려 인플레 위험이 크다. 기업의 비용이 증가하면서 이익 증가율이 둔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주가는 주주보호 시스템 확립과 기업 이익 증가의 두 축에 의해 결정된다.

新주권문화가 왔고 시스템이 변했다. 소액주주도 회사의 주인이 될 수 있게 됐다. 또 1998년은 환차익 때문에, 1999년도는 인건비 감소로 인해 기업이익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게다가 구조조정과 금리하락의 영향으로 2000년까지 이익 증가세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투자의 환경이 마련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증권은 끝났다며 손해를 무릅쓰고 증권시장을 빠져나갈 때 나의 全재산인 3억원을 들고 객장을 찾았다.

「기업이 최소 3년은 좋아지는데 과연 어떤 주식을 살 것인가? 기업이 좋아지면 주식거래량이 늘어날 것이고 거래대금이 많아지면 거래대금 변동에서 생기는 증권회사 수익이 늘어날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에서 證券株(증권주)를 사기로 결심하고 2개월 동안 계속 시장을 살펴보았다. 일단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 자신이 사려는 주식의 주가동향을 일단 살펴보는 것이 좋다. 이를테면 생각끼리 싸움을 시키는 과정이다. 머리 속에 시뮬레이션을 만들어 주식을 집어넣어 가동해 보는 것이다.

주식을 사기 전에 경기와 기업분석을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는 질문도 자주 받는다. 나는 거시변수에서 시작해서 기업 세부적인 내용을 분석하는 톱다운(top-down) 방식과 반대로 기업 세부적인 내용을 분석해서 거시 변수까지 살펴보는 버텀 업(buttom-up) 방식을 모두 사용한다. 또 개별변수가 기업과 시장에 끼치는 영향도 감안한다. 예컨대 환율과 반도체 값, 철강제 가격 등은 생산 요소의 비용을 결정하는 중요 변수로 주가에 끼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이들 변수는 수시로 파악해야 한다.

나의 투자전략은 內在가치가 우량한 종목에 대해 적절한 매수시점을 잡아 장기 보유하는 형태이다. 즉 앞으로 오를 것이라고 판단되는 주식을 사서 그 주식이 오를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리는 것이다. 나 자신이 그 회사의 주주라는 관점에서 투자결정을 한다. 주식의 時勢差益(시세차익)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장래에 얼마나 많은 배당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가치를 두고 판단한다. 철저하게 원칙에 충실하라는 것이 내가 스스로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低(저)평가된 종목을 찾아서 1년이고 3년이고 보유하는 것이 바로 정석투자이다.


證券株 매입으로 고수익


1998년 3월 證券株를 사기로 결심하고 2개월 동안 지켜볼 때였다. 나는 보통주보다는 우선주에 관심이 많았다. 보통주는 의결권이 있고 우선주는 의결권이 없는 대신 보통주보다 1%포인트의 배당을 더 받는다. 내게 왜 주식에 투자하느냐고 묻는다면 첫째 배당금을 받기 위해서이고 둘째 기업 내에 존재하는 주주몫에 대한 청구권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다. 우선주가 싼 이유는 그동안 배당을 잘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익이 나면 대주주가 돈을 빼돌리거나 다른 데 투자했던 것이다. 그러나 IMF를 거치면서 관행이 바뀌면 주주들도 배당을 요구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보통주의 3분의 1 가격인 우선주가 훨씬 효용이 높아 질 것이다.

배당관행이 정착되면 앞으로 우선주가 오를 것이라는 생각에서 1998년 3월에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대신증권 우선주 42만주를 6백50원에, 동양증권 우선주 8만주를 9백30원, 부국증권 우선주 2만주를 1천2백원에 사들였다. 주가는 바닥에서도 조금씩 움직이는데 3월부터 6월까지 가격이 낮아지면 계속 사들였다.

내가 갖고 있는 3억원과 신용 거래 1억8천까지 총 4억8천만원어치를 샀다. 중간에 주식이 올랐을 때 일부 처분하여 우선 1억8천만원을 갚았다. 1998년 12월 대신증권은 6백50원에서 1만2천3백원, 동양증권은 9백30원에서 9천6백원, 부국증권은 1천2백원에서 1만3백원으로 올랐다. 1998년 11월과 12월, 두 달에 걸쳐 주식을 팔았는데 매도 금액은 평균단가이다. 대신증권의 경우 1만6천1백원에 팔기도 하고 때로는 9천원에 팔기도 했다.

1998년 12월 이 주식을 팔아 정산을 해보니 모두 67억원이 되었다. 원금 3억원을 뺀다면 64억원의 이익이 난 것이다.

내가 처음 살 때 3년 정도 지나 證券株가 1만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빨리 올랐다. 환율과 금리가 빨리 낮아졌기 때문이다. 우리 경제가 그만큼 급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증권우선주는 회사가 주주가 납입한 자본에서 연간 1백%의 수익이 났을 경우 연간 12%내의 배당을 할 것으로 예상했다. 2~3년 후 배당을 할 것이라고 예측했었는데 그 시기가 앞당겨져 올 3월에 배당을 했다. 액면가 5천원의 12%는 6백원이므로 6백원에 주식을 산 사람은 매입가격만큼의 배당을 받은 셈이다.

증권주를 판 다음 장기적으로 보유할 주식을 매입하기로 했다. 1998년 11월부터 증권주를 팔면서 다른 주식을 매입하기 시작했는데 11월과 12월에 걸쳐 매입한 주식은 삼성전자 우선주 1만주를 한 株당 3만3천원에, 한진해운 보통주 10만주를 9천원에, 삼성증권 보통주 한 株당 3만주를 1만7천원에, 한진 보통주 32만주를 1만3천2백원에 매입했다. 삼성전자 외에 다른 주식의 경우 보통주를 매입한 이유는 우선주가 없었기 때문이다.


物流 전망 보고 한진 매입


사람들은 내가 왜 한진주를 32만3천주(지분율 5.12%), 42억7천만원어치나 매수했는지 궁금해한다. 나는 1995년부터 이 종목에 관심을 두고 있었고 다른 사람에게 한 번 권했다가 손해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손해보는 일은 없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주식을 직접 사기 훨씬 전에 이미 정해놓고 오랫동안 살펴보는 기간을 가진다. 이 회사는 앞으로 4~5년간 장기적인 성장성이 기대되는 회사였다. 구조조정을 통해 총비용의 38%에 달하는 인건비를 줄이고 있는 데다 당시 金利와 油價 하락 등으로 영업외 비용도 감소해 1년 내 株當 순이익(EPS)이 크게 개선될 것으로 분석되었기 때문이다. 또 국내 기업들이 구조조정차원에서 물류 부분을 앞다투어 아웃소싱(Outsourcing, 외주가공)하고 있어 한진이 성장할 가능성이 커졌다.

또 하나의 요인은 홈쇼핑의 호황이었다. 당시 케이블 텔레비전은 적자를 면치 못했는데 홈쇼핑만 잘된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LG홈쇼핑과 39쇼핑을 통해 방안에서 물건을 구입한 사람이 있다면 분명 누군가가 배달을 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두 회사의 물건을 어디서 배달하는지 알아보았다. LG는 한진에서, 39쇼핑은 대한통운에서 담당하고 있었다. 인터넷 상거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物流회사가 잘되기 마련이다. 결국 이런 식으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것이 주식투자의 성공을 가져온다. 한진株를 산 것에 대해 혹시 경영권에 관심이 있는 것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지만 가격이 떨어질 때마다 사다보니 그렇게 산 것뿐이다.

지난 1월27일 한진주 5.12%를 매입한 뒤 한진 사장님께 편지를 썼다. 내가 주식을 매입한 사실과 함께 불공정 거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진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가치투자를 했다는 것을 알리고 몇 가지 당부를 했다. 소액주주를 소중하게 여기고 계열사나 관계사와 투명한 거래를 해줄 것을 부탁했다. 내가 제의한 것은 딱 한 가지. 주주총회에서 전문경영인에게 스톡옵션 제도(경영자나 고용인에게 월급 이외에 주식을 경영실적에 따라서 보너스로 주는 것)를 도입해 기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자고 제의했다. 하지만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한진해운은 수출물량이 늘어나면 물동량이 증가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해운회사의 이익이 증가할 거라고 봤기 때문에 매입했다. 全세계 경제지도를 봤을 때 완제품을 만드는 나라는 아시아이고 원재료를 공급하는 회사는 남미 러시아 중동지역이다. 자본은 미국과 유럽이 공급한다.

아시아에서 문제가 생기면 러시아가 힘들어지고 결국 미국까지 힘들게 된다. 그러나 먼저 고통받은 나라는 먼저 일어나기 마련이다. 아시아가 먼저 고통받았기 때문에 먼저 일어날 것이고 한국은 바닥을 쳤다는 판단이 섰다. 그렇게 되면 물동량이 증가해 해운회사 쪽의 이익이 증가할 거라고 내다봤다. 또 앞에서 얘기한 대로 전자상거래가 활발해지는 新유통문화에서는 배달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가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최후까지 살아남을 주식을 찾아라


그동안 우리나라 기업에 아웃소싱 개념이 전혀 없었다. 해낼 능력이 없는 사업까지 하겠다고 나서서 문어발식 경영을 했는데 앞으로는 선택과 집중 전략에 의해 아웃소싱 문화는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아웃소싱의 대표적 산업이 바로 물류업이다. 한진은 육상, 한진해운은 해상 운송을 담당하고 있다.

삼성전자 株를 산 이유는 반도체 때문이다. 21세기는 정보통신 산업이 발달하게 된다. 삼성전자는 세계 최고의 반도체 제조기술을 갖고 있는 세계 최대의 반도체 회사이다. 정보통신산업이 발달하면 반도체 수요는 당연히 증가하고 가격도 강세를 띠게 될 것이다.

삼성증권은 증권사 가운데 최우량 기업이라는 이유 때문에 선택했다. 기업수익이 증가하면 덤핑문제가 발생한다. 기업이익이 증가하면 증권회사의 수익도 늘어나고 몰려드는 사람도 많아진다. 증권회사도 자연히 많아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쟁이 심해져 몇 개 회사는 퇴출되고 나머지 회사가 망한 기업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예전에 생맥주집이 엄청난 인기를 끌자 여기저기 우후죽순처럼 ○○호프라는 이름의 집이 생겨났다. 호프집이 많이 생기면 당연히 덤핑으로 물건을 팔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다 보면 가장 제품의 질이 좋고 서비스가 좋은 곳, 아주 돈이 많은 곳만 살아남게 된다.

증권업에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가장 경쟁력이 있고 나중에도 살아남을 회사로 삼성증권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매입한 것이다. IMF로 인해 全 산업이 고통을 겪었다. 고통을 겪는 가운데 살아남는 기업은 산업 내에서 비교우위를 가지는 것이다. 또 삼성증권의 경우 상대적으로 덜 올랐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매입했다. 대신증권이 6백원에서 1만2천원까지 올랐을 때 삼성증권은 5천원에서 1만7천원으로 올랐을 뿐이다. 그렇다면 아직도 오를 여지가 많다는 얘기가 된다.


3년 안에 2천5백억 수익 예상


삼성증권과 한진해운 주식은 팔아서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하는 데 사용했고 지금 한진과 삼성전자 우선주를 갖고 있다. 경영권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목표가격에 이르면 두 회사의 주식도 매각할 것이다.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한 이상 나는 더 이상 주식투자를 할 수도 없다.

대신 나의 회사를 키울 것이다. 3년 뒤 내 회사를 증권거래소를 통해 上場(상장)시킬 예정이다. 현재 에셋플러스에는 펀드매니저 10명을 포함해 직원이 28명이다. 7월14일날 개업했는데 9월3일 현재 보험회사, 은행, 상호신용금고 등 기관투자가들이 우리 회사를 믿고 6백50억원을 맡겼다. 45일 사이에 3백50억원의 이익을 내서 1천억원으로 자산이 늘어났다. 이 기간 동안 종합주가지수가 9백50선에서 9백10선으로 떨어졌지만 우리는 가치투자를 통해 자산을 늘린 것이다. 모회사에서 며칠 내로 3백억원을 맡기겠다고 예약한 상태이다.

나는 10명의 펀드매니저를 잘 키워서 금융산업 선진화에 앞장서는 일꾼들로 만들고 싶다. 신입사원 교육은 특별한 게 없다. 1대 1 토론을 벌이면서 가치에 관해 얘기하는 게 전부이다.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모양을 보는가, 신문기사와 사회현상을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가 등등 사고의 유연성을 길러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대화를 하는 것이 교육의 전부이다.

우리 회사는 처음 돈을 맡을 때 1%를 관리보수로 받고 나머지는 성과보수를 받는다. 성과보수는 해약할 때나, 계약 1년 후 정산을 하여 종합주가지수를 초과한 초과수익의 25%를 받게 된다. 종합주가지수가 정기예금 금리보다 상승률이 낮을 경우 정기예금 금리 초과분의 25%를 성과 수수료로 받게 된다.

이제 내 돈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고객들의 돈을 늘리는 일에서 보람을 찾는다. 불특정 다수를 위해 내 생각을 펼치고 좋은 수익률을 올리는 것, 좋은 회사에 투자해서 그 회사를 발전시키는 일에서 나는 기쁨을 얻고 싶다.

상장되면 우리 회사의 가치는 5천억원 정도 될 것으로 예상한다. 내가 53%의 주식을 갖고 있으니 그때가 되면 나의 재산은 2천5백억원이 넘을 것이다. 과연 그렇게 되겠느냐고 묻겠지만 나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는다. 가치투자를 통해 우리 회사는 반드시 좋은 회사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내가 애초에 1억원을 가지고 있던 시점이 1997년 12월이다. 채 2년이 안된 시점에서 나는 실로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염원하던 회사를 차렸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내가 주식 종목을 선택하는 것이 어려운 이론을 동원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상식 선에서 판단해서 주식을 샀을 뿐이다. 나는 1989년부터 10년간 주식시장을 떠난 적이 없고 누구보다도 생각을 많이 했다. 이렇게 수익을 올린 가장 큰 요인은 물론 생각이다. 또 하나 인내하는 것이다. 주식이 오를 때 그 가치를 측정하면서 최고의 가치라고 여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행여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중간에 매도해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가치를 안다면 그런 우를 범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디지털 관련株를 사라


「앞으로 어떤 주식이 오를까요? 앞으로 어떤 주식에 투자하면 좋겠습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문제이다. 지금까지가 산업혁명의 시대였다면 앞으로는 지식과 정보혁명의 시대이다. 과거에는 철강, 석유, 화학 등이 주류산업이었다. 이러한 산업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땅과 공장이 필요했기 때문에 부동산이 중요했다. 하지만 지식과 정보혁명에서는 사람과 지식이 필요하다. 트랜드가 바뀌고 패러다임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가치와 효용을 만들어야만 가격이 높게 형성된다. 이제 부동산의 매력인 투자가치가 약해지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기업 가운데서는 디자인과 서비스를 어떻게 더 가미하는가 하는 것을 주시해봐야 한다. 즉 연구를 거듭하여 지식을 접목시키는 기업이 우량기업이 될 것으로 본다. 우리 주변에는 이미 만족스런 효용가치를 느끼는 제품들이 많다. 식기와 도자기를 예로 든다면 그 제품의 質(질)은 이미 충분히 좋아졌다. 만족스런 효용을 느끼는 제품은 이제 디자인이 관건이다. 결국 지식과 정보를 반영하여 생산하는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정보통신 분야의 산업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급속하게 변화하는 가운데 그것과 관련된 기업의 株價가 오를 것으로 본다. 디지털과 관련된 장비를 만드는 회사, 디지털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 디지털 서비스 통로를 제공하는 회사가 성장할 것이다. 그런 기본적인 생각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생각을 거듭하면 분명히 떠오르는 주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주식은 투기 아닌가요. 과연 주식투자를 해야 하나요』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많다. 예전의 주식은 분명 투기였다. 그러나 투기의 세계에서 투자의 세계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이 흐름에 참여하라고 권하고 싶다. 주식은 환금성이 좋고 수익성이 좋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분야이다. 부동산과 달리 언제든지 사고 팔 수가 있고 매도할 때 0.3%의 거래세를 제외한 다른 세금은 없으며 잘만 하면 정기예금 금리의 4~5배나 되는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시장 참여는 하되 전문가 집단에게 의뢰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뮤추얼펀드나 주식형 수익증권 등의 간접투자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전에는 기업들이 직접 투자를 했지만 이제는 투자자문회사에 맡긴다. 거대한 기업도 전문분야가 아니면 아웃소싱을 하고 있다. 기관투자가들도 전문가 집단에게 의뢰하는데 개인투자자들이 직접투자를 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주식이 본업이 아니라면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간접투자하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도 직장인들이 직접투자를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잘못된 일이다. 주식투자는 여가시간을 이용해 한가하게 할 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직장 일에 전념해야 할 직장인이 직접투자를 하려면 엄청난 에너지와 시간이 소비되는데 직장마다 주식투자 열풍이 분다는 얘기를 들을 때면 여러 가지 걱정이 앞선다.


일을 주체할 수 없는 펀드매니저들


기자들은 나를 취재할 때면 대개 주식투자 10계명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다. 그것은 개인투자가들에게 투자를 부추기는 일이다. 예를 들어 모든 국민이 주식투자에 매달린다면 그것은 엄청난 국가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이 많은 분들 중에 꼭 직접 투자를 하면서 경제감각을 익히고 싶은 분이 있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유자금의 10% 이내, 금액으로는 1천만원 이하의 자기 자본을 투자하되 시세차익을 노리지 말고 가치투자를 하라고 권하고 싶다.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돈을 빌려서까지 투자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자신이 투자를 하더라도 우수한 영업사원의 조언을 받는 것이 현명하다. 돈을 맡길 곳을 정하려면 최소한 50명에게 상담을 한 후 정해야 한다.

어쨌거나 자신이 사고 파는 시점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선 가격을 찾지 말고 가치를 찾는 타이밍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반도체 값이 바닥이라면 삼성전자株를 살 시점이다. 파는 시점을 개인투자가들이 파악하기 어려운데 주가가 오르는 속도가 현저히 둔화되는 한계상승률에 이르렀다고 생각될 때가 바로 매도 시점이다.

또 처음에 살 때 내가 목표한 가격대가 됐더라도 기업 이익이 더 좋아질 수 있다. 그럴 때는 더 기다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흐름을 볼 수 있어야만 이러한 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펀드를 운용하려면 운용 전문인력 다섯 명을 고용해야 하는데 운용 전문인력 제도라는 것이 문제가 많다. 1998년 하반기 뮤추얼펀드를 도입하면서 기존 투신사 펀드매니저들에게만 운용 전문인력 자격증을 주었다. 증권사 펀드매니저들도 시험에 합격해야만 운용 전문인력이 될 수 있다. 證券協에서 2개월간 연수를 받고 시험을 치러야 한다는데, 과연 연수를 시키는 사람들이 증권을 얼마나 아는가 하는 것도 문제이다. 나 역시 이 시험을 보기 위해 연수를 받아야 한다. 미국의 경우 조지 소로스 같은 사람도 자격증 없이 일하고 있다. 펀드를 운용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요건은 도덕적 철학을 가진 사람과 천부적인 소질, 창의적인 아이디어, 가치를 찾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미국에서는 경제사범, 불공정 거래자, 내부자 거래 등 도덕적 결함이 있는 사람만 빼고 누구나 자산운용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연수를 받고 시험에 합격한 사람만 된다고 못박고 있다.

자산운용사의 펀드매니저를 뽑는 것은 그 회사 사장의 몫이다. 그리고 고객들이 가장 큰 감시자이다. 문호는 개방하되 감독은 철저히 하여 소비자인 투자자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 주어야 한다. 현재의 운용 전문인력 제도는 소비자 주권을 침해하고 있다.

돈의 여유가 있는 家計(가계)에서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에 돈을 맡기면 기업들은 그 돈을 빌려서 사업을 한다. 가계자금이 예전에 은행 예금형태에서 주식과 채권으로 바뀌고 있으며 기업들도 부채를 정리하고 자기 자본으로 옮아가고 있는 과정이다. 이럴 때 중간에서 관리하는 기관들도 그에 걸맞은 역할을 해야 한다.

연초에 주식형 수익증권이 5조원이었는데 이제 44조원을 넘어섰다. 이 자금을 잘 운용해야 개인과 기업, 나아가서 국가가 큰 이익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 수익증권을 운영하는 펀드매니저가 현재 50명에 불과하다. 아무리 훌륭한 매니저라고 해도 약 1조원을 관리하는 것은 무리다. 펀드매니저들이 일을 주체할 수가 없어 연구를 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렇게 되다 보니 초우량주에만 투자를 하게 되고, 결국 초우량주의 가격이 가치 이상으로 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금을 필요로 하는 우수 중·소형주를 돌아볼 시간이 없는 것이다.

매니저들이 책임회피적 투자를 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행여 손해볼까봐 안전한 투자만 해 수익을 종합주가지수보다 높여야 한다는 수익률게임에 치중하는 것은 잘못된 관행이다.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지나친 규제로 펀드매니저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다. 정부에서 유가증권 업무에 대해 좀더 신축적으로 대응해야 할 것이다.

금융시장이 존재하는 이유는 다수의 고객이 가지고 있는 한정된 돈을 잘 운용해서 좋은 기업, 성장 가능한 기업에 투자해서 기업의 성장을 돕는 것이다. 고객과 기업 사이에서 매개가 되는 중간 지점인 자산운용기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한정된 고객의 돈을 전망이 없는 기업에 투자하면 고객이 손해보고 국가적으로도 손실이 클 수밖에 없다. 한정된 자원을 좋은 기업에 투자하여 좋은 효과가 나타나면 고객도 좋고 국가적으로도 큰 이익이다.

주식투자는 꼭 필요한 일이다. 기업이 증자를 했을 때 들어오는 자본은 고스란히 기업의 돈이다. 우량 기업이 필요한 시기에 안정적인 돈을 확보해 사업을 하면 그만큼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다. 주식은 그 돈으로 수익을 내고 배당을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주식을 산 투자가도 좋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

개인은 투자를 해서 수익을 얻고 기업은 사업자금을 얻어 사업을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주식시장이 활성화되어야 마땅하다. 그 중간자적 역할을 잘 해 우리 경제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구술정리·李根美 자유기고가〉
♠ 발행일 : 1999.10.01
♠ 기고자 : 이근미
서지정보
♠ 기사 ID : m01999100135801
♠ 잡지명 : 월간조선
♠ 면종 : 사람
♠ 페이지 : 358~376
♠ 본문자수 : 39937
♠ 기사유형 : 인물
♠ 지역분류 : 한국
♠ 표/사진/그래픽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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